아침에 눈을 떳을때 이 곳이 낮선 곳임을, 이 곳이 도쿄이고 아직 여행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안도감을 느낀다.
미지의 세계는 아직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밖으로 나가니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나는 인생을 항해하는 작은 돛단배가 되었다.
몇 번을 와도 도쿄는 언제나 나를 감성에 젖게 만든다. 같은 장소라는 건 없는지도 모른다. 기온, 습도, 바람의 세기가 똑같은 날이 있을까? 도시에는 새로운 상점이 생기고, 오래된 노포에는 세월이 더 묻는다. 도시도 변화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유행을 따라 입는 옷도 변하고, 시대에 따로 생각도 변해간다. 가장 큰 변화는 여행의 주체인 나이다. 오늘은 과거의 어떤 날과도 같지 않다.
아침에 확인해본 일기예보에서 내일 부터 날씨가 흐려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흐린 날에 오히려 인물 사진을 찍기 좋다는 사진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아쉽게도 홀로여행이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맑은 날씨를 맘껏 즐기기 위해 도심보다 도쿄의 외곽으로 향하기로 했다.
후지산으로 갔으면 좋았겠지만 하필 여행 당시인 11월이 성수기라고 한다. 예매를 하려 해도 이미 표가 다 매진되었다. 일본도 이때 단풍 시즌이라 3천미터의 거대한 단풍 후지산을 보러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겠는가? 준비없이 온 나를 원망해 본다.
그래도 항상 마음속 2지망은 준비되어 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가와고에라는 곳으로 떠나보려고 한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사진속에는 검고 고즈넉한 옛 건물과 거리들이 마치 교토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떠나보자.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목적지로 가기 전에 아부라 소바를 먹으로 갔다. 도쿄 곳곳에 위치한 체인점인데 블랙핑크의 제니가 식사 장면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해 유명해졌다고 줄서 있는 한국사람이 하는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음식계의 라부부인가 싶다. 가게 이름 그대로 해석하면 기름 소바인데, 느끼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오픈런을 했기 때문에 바로 입장 할 수 있었다.(대기줄이 그렇게 길지는 않다.)



맛은 마제소바와 거의 흡사하다. 매콤하기 때문에 느끼하지 않게 먹을 수 있고, 면 굵기도 두꺼워서 칼국수 같았다. 기름소바라는 이름과 달리 느끼하지 않았지만, 마제소바의 하위호환적인 느낌이다.
나와 동시에 입장한 남자 손님이 하나 있었는데, 접시에 고개를 박고 거의 5분만에 그릇을 비우고 가버렸다. 삼일은 굶었거나 10분이상 의자에 앉아있으면 전기가 흐르기라도 하나 의심했다. 문뜩 예전에 본 인터넷 글이 떠올랐다.
일본에서는 혼자 온 손님은 빨리 먹고 가는 것이 가게주인에 대한 예의라고 하는 글이었다. 메이와쿠라고 남에게 피해를 극도로 싫어하는게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이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이 문의 닫힘버튼을 누르는 나라, 그것이 일본이다.
나도 그 영향으로 후루룩 후루룩 급하게 한그릇 해치웠다.
아부라 소바 3.7/5
가와고에까지 신주쿠역에서 기차로 한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일본에서는 기차를 타는 건 왠지 낭만적인 기분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꼭 기차에서 도시락까지 먹어보는게 내 버킷리스트이다. 가와고에에 도착하니 확실히 도심을 벗어난 어떤 한적함이 묻어 있었다. 블로그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사진을 많이 못찍었는데 빨리 스킵해보도록 하겠다.


낚시하듯 즐기는 운세 뽑기이다. 시주함에 500엔을 넣고 낚시대를 꺼내 사용하면 된다. 낚시대 끝에는 자석이 달려 있어서 물고기 모형에 달린 자석에 닿으면 된다. 생각보다 손맛이 좋아서 인형뽑기처럼 중독이 될 뻔 했다. 그 외에 신사는 굉장히 작아서 따로 구경할 만한 곳은 없었다.



신사에서 밖으로 나왔다. 원래 오래된 기와집 사진들을 블로그에 올리려 했지만 한국에 도착해서 보니 마음에 드는 사진이 없었다. 50mm렌즈는 아무래도 배경을 찍는데 제한이 높은 편인 것 같다. 교토랑은 비교 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그만큼 교토는 넘사벽이다.

날씨는 정말 좋다. 이럴때는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선선한 바람에 온몸의 더러운 때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다. 몸이 가벼워지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가와고에는 장어가 유명하다기에 책에서 본 장어 덮밥 맛집으로 갔다.

책에서 추천해서 갔지만 맛은 별로였다. 가격은 저렴하지 않았고, 서비스는 그래도 평범했다. 음식은 금방 나왔지만 장어에서 비린맛도 좀 나고 가시도 몇 개 씹혔다. 이번 여행에서 최악의 점수를 받은 식당이다.
우나기 덴베 3/5
도쿄에서는 매 끼니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한다는 주의이다. 한끼라도 실패하면 돈도 아깝지만 내 소중한 시간에 때문에 속에서 분노가 끓어 오른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치며 만병의 근원 스트레스를 차단하는 것이 나에게 더 이롭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할뿐히다. 그래도 입에서 가시지 않는 비린내는 제거해야 겠다 싶었다. 아까 걷는중에 눈여겨 본 탐스런 소프트 아이스크림 그림이 생각났다. 가와고에는 고구마가 특산품이라 아이스크림도 노랗다. 마치 황금처럼.

골드와 블랙의 조화.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다. 마치 예술작품을 보는 것 같다. 맛은 어떨까?
너무나도 익숙한 바밤바 맛이 난다. 하지만 훨씬 고급스럽고 진한맛이었다.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워버렸는데 하나 더 사먹으려는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배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
가와고에서의 여행은 이렇게 끝났다. 숙소로 그냥 들어가면 아쉬우니 이케부쿠로를 들르기로 했다. 도쿄의 5대 번화가중 하나라고 하는데 신주쿠나 시부야에 비해서 현저히 사람이 적었다. 역안에는 부엉이 동상이 있는게 특이하다.



이곳에 빅카메라 본점이 위치 하고 있다. 딱히 가야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본점이라고 하니 한번 가보기로 했다.
상호 그대로 카메라만 있는 곳은 아니었다. 돈키호테 처럼 다양한 제품들이 있었다. 구경이라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갑자기 급똥이 매려워 졌다. 급하게 화장실을 찾는데 세상일이 참 쉽지가 않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기도 하고 몇 층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화장실을 찾아 전쟁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중에는 뛰었다.
겨우겨우 변기에 앉았을때는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화장실에서 큰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뭔가 허탈하면서 자괴감이 들었다. 여기 뭐하러 들어온거지… 똥싸러 온건가. 괜히 무리해서 온 것 같아. 숙소에 들어갔으면 좋았을 걸. 지금이라도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축 처진 어깨로 에스켈레이터를 다시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괜히 아쉬움에 시야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층간을 두리번 거렸다. 사실 아까 허둥되며 돌아다니다가 어떤 여자를 보았는데 자꾸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새하얗고 작은 사람인데 볼 위에 주근깨가 귀여운 여자 아이 였다. 혹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두리번 거린 것인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잠옷 코너가 보였고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니 잠옷이나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불면증이 있어 잠옷이 문제인가 고민한 적이 있다)
까만색, 회색, 칙칙한 잠옷이 걸려있는 진열대를 지나다가 진열장 사이에 우뚝 서있는 그녀를 보고 말았다.
순간 놀라 그녀의 시야 밖으로 숨었는데, 동작이 컸는지 그녀도 알아차린 것 같은 눈치였다. 다시 그곳을 바라보니 진열장 사이로 움직이는 그녀의 뒷 모습이 보였다. 나를 피해 사라지려는 걸까? 나는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과 만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공존했다. 양자역학적인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발걸음. 그녀도 그 곳을 떠나지 않았고, 나와 애매한 거리를 두며 의도적으로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3평도 안되는 그 공간속을 우리는 계속 부유했다.
지금 여기서 갑자기 방향을 틀어 뒤돌아서면 그녀와 마주칠 수 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용기 없는 나를 자책했다. 자책감이 마치 채찍처럼 내 몸을 휘감는다..
불연듯 나는 뒤돌아 섰다. 그건 어떤 용기도 계획도 무모함도 아니었다. 무의식에 가까웠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녀를 마주쳤을때 우리는 서로 잠시 바라 보았다.
긴 시간은 아니었다. 3초? 하지만 충분한 시간이었다. 또한 부족한 시간이었다.
충분하다는 것은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내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부족하다는 것은 어떤 말을 해야할지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어가 서툰 것도 큰 족쇄가 되었다.
우선 떠오르는 말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잠옷을 물어보자.
나는 내 팔을 자르는 시늉을 하며 반팔 잠옷이 있냐고 물어봤다. 본심과 멀리 떨어진 질문이었지만 오히려 부담되지 않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미찌카이?(짧다는 일본어)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아, 왜 이 단어가 생각이 안났을까? 나는 고개를 여러번 끄덕였다. 그런 내 모습이 귀여웠는지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 같이 잠옷을 같이 찾아 주겠다며 앞장섰다. 진열대를 뒤적이는 그녀의 뒷 모습을 보는데 너무 귀여웠고, 나를 위해 움직이는 그녀의 팔다리를 보며 생명체의 겅이로움에 감동했다.
그녀는 노력했지만 진열장에는 미찌카이 잠옷은 없었나 보다. 그러나 나의 그녀는 포기 하지 않았다. 나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창고 같기도 하고 고객센터 같기도 한 장소였다. 그녀는 그 곳의 한 직원에게 내 사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나를 쳐다보았는데 나는 눈 웃음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다시 돌아온 그녀는 잠시 기다리면 처리가 될 것이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하얀 미소를 남기고 잠옷 코너로 돌아갔다. 처리가 완료되면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야지. 그리고 감사의 말과 인스타 아이디를 물어봐야 겠다. 나는 굉장히 들떠 있었다.
상상속에 초점이 뺏겨 있었던 내 앞에 어떤 여자가 서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까 그녀의 말을 듣고 창고에서 잠옷을 찾으로 간 직원이었다. 평범한 사무직 셔츠에 빅카메라 로고가 박힌 남성적인 조끼를 입은 여자. 간단히 말하면 귀여운 여자인데, 자세히 말하자면 떠오르는 적당한 표현이 없다. 특징없는 완벽한 조화라고 해야되는 걸까? 중요한건 방금전의 여자는 내 머리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눈앞의 여자에게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방금 전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니 못생겼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랑이란게 이렇게 가벼운 것이었나?
마치 오래된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주머니에 새담배를 넣듯이 내 기억, 감정들이 그렇게 쉽게 변해 버렸다.
물론 단어의 선택이 올바르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담배를 사랑에 견주다니 무례하다. 지금은 심지어 담배를 끊은지도 1년이 넘었다.
두번의 감정 모두 진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감정의 여백이 2년의 기간을 두고 있다면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그저 두 감정의 여백이 지나치게 짧은것이 문제였다.
만약 내가 어떤 여자와 결혼을 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남자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식의 마지막 버진로드를 걸으며 퇴장한다. 퇴장하는데 어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 그런데 마음을 옥좨여 오는 사랑의 고통에 휩싸여 버린다면 어떡해야 할까?
이런일이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 나이브하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사람의 매력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평등하다는 얘기는 아니고 모두 각각의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보통 위로의 말이 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의 매력은 쉽게 우선순위가 변경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현재의 사랑은 시간에 따라 무뎌질 것이고,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비중이 높아진다.
한사람과 변하지 않는 사랑을 하겠다는 건 어떻게 보면 모두 위선 아닐까? 나를 속이고, 사회를 속이고 말이다.
한국인이세요?
생각에 잠겨 있던 내게 그립지만 놀라운 말이 귀로 흘러들어 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꿈뻑거렸다.
네 맞습니다.
안그래도 사랑에 빠진것 같은데 노스텔지어 마케팅까지 겸해지니 이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정신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잠옷이 없다는 얘기를 나에게 전달 했고,더 이상 서로 더이상 할말은 필요 없었다.
어려보이세요. 이 근처에 맛집이 있나요?
등등의 시덥지 않은 대화를 이어나가 보았지만 모두 껍데기 일 뿐이었다.
그녀는 그저 나를 손님으로만 생각했을 뿐이고, 나의 감정은 이제 나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다. 이곳을 떠나는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쓸쓸히 빅카메라를 그렇게 떠나갔다.
봄의 충만함 짤게 왔다 사라지고 겨울의 쓸쓸함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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